본문말씀 : 여호수아 19장 9절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난 지 40년 만에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해서 여리고 성과 아이성을 점령한 후 남부연합군과 북부연합군을 차례로 무찔렀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찌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대장이 대신 싸워 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12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하게 됩니다. 모세 시절에 요단강 동쪽을 통해서 올라오면서 이미 점령했던 요단강 동편의 땅을,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땅은 나머지 지파들에게 분배를 하면 됩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을 분배받는 과정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땅을 나누어 주십니까? 아무리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로 약속하셨다고 해도 그렇죠. 하나님을 수없이 원망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 백성들이 뭐가 예쁘다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빼내 주셔, 만나로 먹여주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주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셔, 가나안 원주민들을 상대로 대신 싸워주시고 그 땅을 나누어주십니까?'
그게 바로 너란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그게 바로 너란다. 내가 네 안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려고, 너를 참고 기다려 주고 있지 않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오래 참고 기다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악하고 더러운 생각, 자기중심의 생각을 정복하고, 거룩한 나라,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나라를 넓혀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전쟁은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에게 군대장관을 보내주셔서 대신 싸우게 하신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워주십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제대로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다
땅 분배 얘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땅 분배 과정에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지파는 유다 지파와 요셉의 두 아들,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이들은 원하는 지역을 정해서 달라고 했고, 정복하기 힘든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7지파는 어느 곳 하나를 정하지 못했고, 선뜻 정복하려는 열정도 보이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지지부진한 7지파에서 3명씩 선정해 이들로 하여금 나머지 지역을 두루 다니며 그려오게 했습니다. 그것을 7개 지역으로 나누고, 그것을 제비 뽑는 형식으로 분배함으로써 정복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여호수아 18장에 나옵니다만, 제일 먼저 베냐민이 제비 뽑아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될 19장에는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6개 지파 즉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단 지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중에서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다소 독특했던 두 지파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 지파에게 분배한 땅은...
우선 단 지파입니다. 19장 40절을 보시면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다”라고 하면서 지명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단 지파는 가나안 땅 중서부지역 즉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작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그때까지도 완전히 정복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땅에는 아모리 족속이 살고 있었고, 아래쪽으로는 지중해에서 건너온 블레셋 사람들이 버티고 있어서 내려갈 수도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서에 이어지는, 사사기 1장 34절에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단 지파는 그 땅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 지파는 가나안 땅 가장 북쪽, 말하자면 갈릴리 호수 위쪽의 레셈지역으로 정탐꾼을 보내서 살펴보게 한 후, 지파 전체가 대이동을 하게 됩니다. 레셈지역은 사사기에서는 <라이스>라고 나오고 있습니다만, 단 지파는 그곳을 점령하여 성을 건설하고 그곳을 단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그래서 여호수아 19장 47절을 보시면,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다고 나옵니다.
47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단이라 하였더라”
그렇게 해서, 단이 이스라엘의 맨 북쪽에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표현할 때 관용어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말을 합니다.(삿 20:1, 삼상 3:20, 삼하 24:2, 삼하 24:15, 왕상 4:25) 단 지파는 작은 땅을 분배받았지만, 적극적으로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이것은 땅의 분배가 기계적이라기보다는, 유동적인 분배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업을 받는 사람들의 적극성에 따라서, 확대 혹은 축소될 수도 있는 분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 땅의 일부를 시므온 지파에게 떼어주다
단 지파에 이어서, 이제 시므온 지파의 땅 분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장 1절부터는 시므온 지파에 대한 땅 분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하나 발견됩니다. 1절 말씀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유다 자손이 받은 땅 중에서 일부를 떼내어 시므온 지파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가나안 땅이 충분히 넓다고 생각해서 유다 지파에게 넓은 땅을 제공했습니다만, 이후 정밀하게 땅을 살펴본 결과 땅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파의 규모에 비해 넓은 지역을 차지했던 유다 지파의 땅을 쪼개서, 다른 지파에게 주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분깃을 받는 것이, 인간의 실수에 의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창세기 49장에서 있었던 야곱의 유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신명기의 모세의 유언에서도 언급이 된 적이 있습니다만, 시므온은 성격이 급하고 잔인하여서, 그의 누이 디나가 히위족속 세겜한테 강간당했을 때, 그들을 속이고 그 족속을 할례 받게 한 후, 무자비하게 칼로 도륙한 적이 있습니다. 야곱이 유언할 때 시므온에 대해서 저주의 예언을 하면서, 다른 지파들 사이에 흩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은 유다지파 땅의 일부인 남부 지역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독립성을 상실하게 되어 그들의 땅은 유다 지파의 영토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땅 분배과정에서 보인 유다 지파의 희생,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예표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유다 지파의 입장입니다. 유다 지파가 자신들의 인구보다 많은 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미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을 시므온 지파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얼마든지 거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지파는 공동체의 평화와 공익을 위해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어놓는 희생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19장 9절 말씀입니다.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
땅 분배 과정에서 보인 유다 지파의 희생은, 유다 지파인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희생은 남을 위해서 또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나의 당연한 권리나 목숨이나 명예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희생이 있지만,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만큼 아름다운 희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부모의 희생도 그 자녀를 죄에서 구원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의 땅을 벗어날 때, 하나님은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삼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함으로써,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이 유월절 사건을 비롯해서,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 희생제물로 오실 것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앞에 걸려있는 이 십자가는 그냥 장식품이 아니라 저주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내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내가 당할 조롱과 멸시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난과 질병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나를 죄에서 자유롭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우리가 자유를 누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으면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으면 저주에서 해방되어 형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오면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라고 이사야 53장 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묵은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룩 없는 빵, 무교병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희생되신 것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묵은 누룩을 내버린다고 하는 것은, 옛사람의 습관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새로운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 24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어떻게 하면 새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성경에 답이 들어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말씀 즉 예수님 안에 있으면 내가 변합니다. 말씀이 나를 인도하십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십니다. (시편 119:105)
둘째로, 예수님의 사랑의 희생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왜 자신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을까요?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사랑가운데 행하도록 친히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라면, 마땅히 예수님을 본받아서 나를 희생해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입니다.
에베소서 5장 2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기독교의 뿌리는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루어간 희생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작은 조직에서 조차도, 누군가의 희생이 있기에 움직여지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은 여호수아 19장 유다지파의 희생정신에서 예수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된 우리가, 나를 희생해서 교회를 사랑하고 내 옆사람을 사랑하고, 우리가 섬기는 분들을 사랑하는 하루를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