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여호수아 9장 14-15절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야훼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어,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대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서에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음란한 족속 가나안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가나안은 누구입니까? 창세기 9장에 보면, 대홍수 이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게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함의 막내아들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하체를 드러내고 자는 모습을 보고,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다른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덮어주었습니다. 술이 깨어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함을 나무란 게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9장 25절 말씀입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왜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하체를 벗었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에는 <남색한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가나안이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고 있는 노아 할아버지를 상대로 이상한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음란한 문화
이렇게 음란문화에 젖은 가나안의 후예들이 정착한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레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지하고 있는, 성에 관한 규례들을 보면,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타락한 모습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가나안 원주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성적 타락상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타락한 문화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옮겨지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하여 그 백성들을 멸하라고 하셨고, 율법을 통해서도 미리 금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해서 가나안 땅의 중부지역인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점령하고, 길갈에 진 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중부지역에서 시작하여 남부지역을 정복하고, 그 다음에는 북부지역을 정복하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오늘 보게 되는 여호수아 9장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남부 지역 정복에 나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가나안 땅에는 7족속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야훼의 도우심으로 요단을 가르고 건너, 여리고 성을 간단히 무너뜨리고 아이성을 정복한 놀라운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로, 남부연합군을 결성하여 싸울 준비를 합니다.
히위 족속의 생존을 위한 속임수
그러나, 남부연합군에 속한 히위 족속 중에서 기브온에 사는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의 실세를 정확하게 파악한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하여 꾀를 내게 됩니다. 마치 먼 여행을 한 것처럼 낡은 차림으로 꾸며서 여호수아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길갈에 있는 이스라엘 진영에 이르러 여호수아와 그 백성에게 '우리는 당신들과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 먼 땅에서 왔습니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그들에 대해서 의심을 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 행하신 일을 들었다, 이스라엘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면서 멀리서 온 것처럼 곰팡이 난 빵조각과 낡은 가죽부대 등을 보여주자,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야훼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곧 기브온 사람들과 평화 조약을 맺고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들과 맺은 조약을 지킬 것을 야훼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지 3일만에, 기브온 사람들한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당시의 관례상으로도, 계약을 체결한 후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경우에는 계약을 지킬 의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계약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하나님 야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맹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수아 9장 22-23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어찌하여 심히 먼 곳에서 왔다고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대를 이어 종이 되어,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리라 하니”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서 기브온 사람들은 죽임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이스라엘을 속인 대가로 영원히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9장에서 보았던 노아의 저주가 실현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결정했는가?
이렇게 마무리되기는 하였습니다만, 사실 이스라엘은 중요한 일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을 함으로써, 뼈아픈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의 음란한 문화 때문에 그들을 다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는데, 기브온 족속과 화친을 맺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을 살려주어야 하는 잘못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실수의 원인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경솔함에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던 사항을,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에 의존해서 처리했던 것입니다. 얼마전 아이성 전투에서 뼈아픈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도 인간적인 판단과 생각에 의존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판단과 생각에만 의지하면, 사람의 속임수와 계략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主)로 섬기는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보다 내 생각이 앞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흐름은, 누가 주인인가의 싸움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부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은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내가 주인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겠다고 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내 판단에는 자기의 (自己義) 가 들어가게 마련
내가 판단할 때는 반드시 나의 욕심이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自己義)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울을 보십시오.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그들을 괴롭혔던 아말렉을 멸하되, 모든 가축과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군대를 소집하여 아말렉을 치고 승리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울이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여, 아말렉의 아각 왕과 제일 좋은 가축들을 살려 끌고 온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를 지적하자 사울은 변명합니다.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제사하기 위해 달라고 요구하기에 허락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백성의 요구에 영합하여 자신의 인기를 높이는 게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상15장22-23절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야훼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야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야훼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가 판단하게 되는 배경에는, 결국 하나님의 의(義)가 아니라 자기의(自己義)가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로, 우리에게는 내가 주인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겠다고 하는 자기의(自己義)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라고 하는 자기의(自己義)를 버리고,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아 하나님의 의(義)를 구하는 삶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마6:33)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기, 순종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하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고 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불러 의롭다고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3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뿌려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고 또 영화롭게 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붙들고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기도할 때, 그 말씀대로 살려고 결단할 때,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속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자기의(自己義)를 벗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 생각과 내 판단을 벗고, 하나님께 나의 주권을 내어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나의 믿음이 하나님 중심으로 성장하고, 나의 인격이 예수님 중심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서 나를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짐을 맡기는 삶
또한 하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고 하는 것은, 나의 삶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내가 나의 짐을 지고 가겠다고 하는 것은,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신다고 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의 짐을 주인되신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짊어진 짐을 맡아주시도록,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본래 우리가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죄의 짐, 저주의 짐, 질병의 짐,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허무의 짐을 대신 지시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 짐을 맡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도 없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서 맡아주시겠다고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지고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예수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있으면 우리가 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우리는 어차피 세상의 멍에를 멜 수 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11장 28-30절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따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나의 짐을, 나의 기도제목을 주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시고 기도로 나의 짐을 맡기는 여러분에게, 마음의 평안과 기도응답이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